강관

강관의 역사2

주연스틸 2023. 10. 13. 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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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강관의 역사1에 이어서 강관의 역사 이야기 올립니다.

 

스탠다드 웰딩사는 이 용접법을 박육소경관(얇고 구경이 작은 관)의 제조에 

결합시켜 자전거 프레임(Frame)용 강관을 생산하였다.

그리고 이보다 조금후에는 독일에서 유사한 조관기가 등장하여

제1차 세계대전 (1914~1918)경까지 자전거 프레임용 강관을 생산하였다.

 

1920년경 노르웨이의 제관업제 손니센(F. Soennischen)은 또 다른 전기용접 강관제조법을 고안하였다.

이 조관기에서는 최대 외경 100㎜에 최대 5㎜ 두께의 강관 제조가 가능했으며, 

용접속도가 분당 50m로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고속이었다. 

 

그러나 이 조관기는 가열거리가 멀어 열의  원주방향으로 전도되므로 용접품질이 

좋지 않았으며, 박육관의 제조에도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특히 전력 소비량이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는 단접관(붙일부분에 열을 가하여 녹인 다음 두드리거나

압력을 가하여 붙인관)의 시대였기 때문에 많은 관심을 불러 일으켰으며, 유럽 각지에 

몇 개의 공장이 건설되었다.

 

초기 강관시장을 점유하고 있는 것을 씸리스 강관이 주이고, 일부가 단접관이었다. 

박육관(얇은관)의 제조가 어려우므로 이를 위해 인발용으로 씸리스 강관이나 단접관이 공급되었다.

따라서 이러한 시기에 등장한 박육관의 제조에 유리한 전기저항 용접관이 시장확대에

유리한 입장을 차지하게 되었다.

 

전기저항 용접관의 제조기술의 발달은 이러한 필요조건들이 많이 작용하였는데, 

특히 외경 확대에 대한 수요자의 요구는 기술개발의 견인차가 되어왔다.

 

1930년까지 미국의 강관수요가 급증하면서

유정용 강관, 석유·가스수송용 강관의 수요도 엄청나게 늘어났다.

그러나 6"이상을 초과하는 규격은 그 당시로서는 단접관밖에 공급을 할 수가 없었다.

 

따라서 소비자들은 두께가 두꺼워 채산성이 없고, 용접품질도 보장되지 않는 단접관을 

어쩔 수 없이 구입해야만 하였다.

 

이러한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1929년 미국의 리퍼블릭 스틸(Republic Steel)사가 

영스타운의 중합단접공장에 7" 시험 조관기를 설치하였다.

여기서 시제품을 생산한 결과 소비자들의 반응이 좋아 본격적으로 외경의 확대가 이루어졌다.

 

당초 전기저항 용접강관의 품질은 원재료인 코일(Coil)의 품질에 의해 크게 좌우되었으나, 

조관기술과 용접기술이 완성 단계에 이를 무렵 우수한 품질의 광폭코일이 생산되어 

전기저항 용접관의 외경확대와 품질 향상에 일조를 하였다.

 

7" 조관기 설치 이후 1930년에는 3" 조관기, 1931년에는 16" 조관기가 설치되었다. 

이렇게 됨에 따라 단접관은 급격히 시장을 잃게 되었고,

1932년에는 영스타운 스틸&튜브(Youngstown Steel & Tube)社가 외경 26"까지를

생산할 수 있는 조관기를 기계제조회사인 요다(Yoder)사에 발주하였다.

 

1940년대까지는 용접기의 주파수가 50~60 싸이클(Cycle)로 상용주파수였다. 

그러나 1950년대에 들어와서 주파수가 180~360 싸이클의 배수 주파수로 바뀌면서, 

용접속도와 품질에 획기적인 향상을 가져왔다.

그 당시로서는 180~360 싸이클의 용접기를 고주파 용접기라 하였는데 요즘에는 

이 정도는 중주파 용접기로 분류할 수 있다.

 

그러나 중주파 용접법은 대용량의 에너지를 용접부에 중점시킬 수 없는 단점이 있는데 

이를 보완하여 개발된 것이 곧이어 등장한 고주파 용접기술의 출현이다.

 

강관의 역사3가 다음편에 계속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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